말레이시아 이주기(말레이시아의 꽃들 2008.05.22)
말레이시아(Malaysia)에도 꽃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볼 수는 없습니다. 늘 무더운 여름날씨라서 초목이 항상 푸르른데 꽃은 많지 않습니다. 산에도 들에도 푸른 풀과 나무는 많지만 우리나라처럼 형형색색의 갖은 꽃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로수나 정원수 중 가끔 꽃이 피어있는 게 있지만 우리의 봄처럼 그렇게 쏟아져 내리듯 꽃이 피지는 않습니다.
꽃도 향기가 많지 않습니다. 향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우리의 아카시아나 라일락이나 찔레꽃처럼 아련한 향기를 주는 꽃은 보질 못했습니다. 철쭉처럼 생긴 분홍색 꽃과 아카시아 나무처럼 생긴 가로수에 핀 작은 노란 꽃을 보았는데 노란 꽃에서 향기가 났지만 아카시아나 찔레꽃처럼 진하지는 않았습니다.
내 살던 고향 가평엔 꽃이 참 많았습니다. 내 집은 가평군 설악면, 그리고 창의리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창의리는 행정지명이고 옛 이름은 '진두둑'이었습니다. 블로그의 '진두'는 그 진두둑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진두둑에서 군청이 가평읍까지 가려면 차를 타고 40분은 넘게 달려야만 했습니다. 집에서 나와 마을 어귀를 돌아 나오고 고개를 하나 넘으면 청평호수가 나옵니다. 호수를 끼고 도로를 달리면 청평댐이 나오고 거기서 경춘국도를 만나 가평으로 내달리면 군청이 나옵니다. 나는 이 길을 10년 가까이 다녔습니다.
내가 느끼는 가평의 봄은, 가평의 꽃은 이 청평호수를 끼도 달리는 곳이었습니다. 가파르게 경사진 도로 옆면에 제일 먼저 피어오르는 꽃은 진달래입니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가시질 않아 검붉은 갈색인 이 산등성이에 진분홍 진달래꽃이 제일 먼저 피어오릅니다. 진달래는 한꺼번에 피어오릅니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순간 눈을 들어 산을 보면 온통 진달래가 피어있습니다. 몽우리부터 피는 게 아니라 하루아침에 모든 꽃들이 피어오르듯 그렇게 진분홍 진달래가 피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피는 게 개나리입니다. 개나리는 진달래만큼 화려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울타리를 만들지 않으면 개나리는 군락을 이루지 않기에 군데군데 노란색을 나타낼 뿐입니다. 개나리는 진달래만큼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 청평호수변의 화려함은 벚꽃이 장식합니다. 강변을 따라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 벚꽃 역시 몽우리부터 피어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합창하듯 일제히 피어납니다. 그 화려함은 눈이 부십니다. 머리 위로 하얗게 터져 오른 벚꽃을 보면서 운전하노라면, 슬픕니다. 화려한 벚꽃도 한 주만 지나면 져버리고 말 것을 알기에 아쉬움이 커 슬퍼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 슬픔은 가슴 아픈 슬픔이 아닙니다. 그저 꽃이 피고 짐을 아쉬워하고 아쉬움이 커 마음이 아린 것입니다. 시간은 어김없이 벚꽃을 지웁니다. 하얀 꽃잎들이 눈처럼 휘날리는데 그 많은 꽃잎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정말 눈처럼 녹아 없어지고 맙니다. 꽃은 피었을 때 화려하고 졌을 때 깨끗합니다.
우리나라의 꽃은 내게 '시'를 주지만 말레이시아의 꽃은 비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퍽퍽할 뿐입니다.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는 건 내가 처한 상황이 그처럼 퍽퍽하기 때문이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겨울이 없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없이 그저 피고 지고 또 피어나는 꽃은 그냥 꽃일 뿐이지 '시처럼 아름다운 꽃'은 아닙니다. 봄에 진 꽃은 무더운 여름과 낙엽진 가을과 길고 추운 겨울을 지나야 만 다시 볼 수 있기에 그것은 아름답고, 그것이 지는 것이 슬픈 것인데, 겨울이 없는 말레이시아의 꽃은 거리의 가로등처럼 늘 그 자리에 있기에 아름답지 않은 것입니다.
2022년 12월 현재
*말레이시아에는 매우 다양한 꽃들이 핍니다. 그것도 사철 다양한 꽃들이 핍니다. 아름답고 또 아름답습니다. 위 글을 쓸 때 힘들었었나 봅니다. 몸은 아프고 살기는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또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컸던 모양입니다.
*말레이시아의 국화(나라 꽃)는 무궁화입니다. 종류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나라 무궁화가 여러 갈래의 가지를 가졌지만, 말레이시아 무궁화는 곧게 뻗은 가지에 매달리듯 피어 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색과 큰 봉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국화 '붕아라야'입니다. '붕아'는 꽃, '라야'는 '국가'라는 뜻을 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