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이주기(강도 사건 이후의 트라우마 2008.02.23)
강도를 만난 이후의 트라우마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육체적인 강함의 필요성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나는 항상 육체적인 강인함보다 정신적인 강인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때문에 운동을 할 시간에 책을 보아왔고, 스포츠 스타보다는 뛰어난 소설가나 철학자를 더 존경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 늦은 나이에 육체적인 강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후부터 다음에 또 강도를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맞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도망갈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적절히 빼앗기고 그 자리를 피할 것인지 등등 여러 가지 상황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에 빠지다가 얼마전 당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분해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곤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정신적인 후유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분간 지속될 듯싶습니다.
강도 이후에 나는 이제 정말 허허벌판에 던져졌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전에는 나를 지켜주는 뭔가 든든한 울타리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이 사회 속에 있고, 이 사회는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누구도 내게 육체적인 위해를 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했습니다. 그 사건은 내 마음의 시야에 있던 울타리가 확 벗겨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운 세상'이라고 말해도 나는 그저 '경쟁이 치열한 세상'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경쟁이라면, 치열하다 해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다지 긴장감 없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서운 세상이라는 것이 단순히 페어플레이 속의 무서운 경쟁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 만난 그들은 물리적인 강도였지만, 또 어느 누가 나에게 물리적인 아닌 정신적인 강도와 도둑이 되어 내 것을 강탈할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슬픈 일입니다. 순수함, 믿음, 인간적, 사랑, 평화, 아름다움...이라는 평정의 상태에서 싸움, 적자생존, 이기적, 돈, 불신, 권모술수...라는 투쟁의 상태가 되어간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가 말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죠. 순수함을 잃어버리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사람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난 아직도 순수함과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그와 같은 힘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향해 내가 순수하다고, 정직하다고 외친다고 항상 세상이 나에게 정직하게 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절감합니다. 이 사실을 내 이전에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었던 것과 내가 그렇게 변한다는 건 큰 차이가 있는데, 지금의 내 마음은 확실히 변할 것이란 것입니다. 순수함이 때때로 나약함이 되고 정직함이 무능력이 되는 사회임을, 이곳 말레이시아에 와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며칠 전 만났던 강도에게, 난 그들이 내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줄 알고 성심껏 귀를 기울였지만 돌아온 건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다고 하여 항상 내게 따뜻한 말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 다른 정신적 칼이 내 몸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사회라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강도를 당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강도는 내게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었습니다. 허허벌판에 던져진 느낌이지만 어쩌면 난 이미 오래전에 벌판에, 수많은 맹수들이 들끓고 있는 벌판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그걸 느끼고 확인하게 해 준 게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말레이시아로 오면서도, 그리고 이곳에서 생활하면서도 매우 낭만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적당히 사업하면 돈을 벌 것이고, 또 내가 성실하면 사람들이 날 믿어줄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맞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사회는 내게 보다 많은 것을, 보다 강인한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2022년 12월 현재 말레이시아는
*한동안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다행히도 강도 사건 후 1달 정도 있다가 동해안 쿠안탄으로 이사를 갔고, 환경이 바뀌면서 마음의 상처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빅** 도넛 매장이 오픈되면서 거기에 집중하니 자연스레 잊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