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이주 5개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말레이시아에 대해서.
이제 말레이시아에 온 지 5개월이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참 많은 것을 겪고 느끼고 경험했습니다. 한국에 남아 있던 아내를 모시고 오고, 강도를 만나 팔뚝을 베이고 지갑, 여권 등 다 빼앗기기도 했고, 사업을 시작해 여기저기 출장도 다녔고, 큰 아이 국제학교에 입학시키고, 현지사람 한국 사람 만나면서 참 많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처음 가졌던 환상이 깨지면서 무척이나 실망도 하고, 약간의 후회도 하고, 삶이 어딜 가나 녹록지 않다는 걸 실감도 하면서 지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과 낯선 땅에서 외로움으로 힘들어하는 아내와 그런 가족들을 보면서 나 역시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모든 걸 다 접고 먼 이국땅에 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 특히 강도를 당하고 나서 인간성에 대한 지독한 불신은 정말 참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맘이 평온합니다. 큰 아이는 기숙사 있는 국제학교에 들어가 잘 지내고 있고, 작은 아이도 곧 학교에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얼굴에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아내는 영어공부에 푹 빠져 몸은 힘들지만 너무나 재밌어하니, 행복해하는 가족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힘이 나고 즐겁습니다. 그리고 사업... 아직 시작은 안 했지만 그런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이곳으로 오면서 딱히 무엇을 하리란 결정을 하고 온 게 아니라서 한 일 년 정도는 이곳 생활을 익히고 그리고 할 일을 찾으려 했는데, 계획보다 일찍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아직도 우려와 걱정 어린 충고를 보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와버렸기 때문에 남은 건 그저 최선을 다해 사업에 몰두하는 일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내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나는 다행이고 즐겁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름답지도, 사람들이 착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더운 날씨, 골목길이나 터미널 등에서 만나는 청년들은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하고, 냄새나는 거리, 결코 싸지 않은 물가, 그러면서도 인건비는 턱없이 적은 나라였습니다. 관광사진첩에서 보는 환상적은 모습은 그저 관광객으로 다닐 때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었던 것이죠. 물론 그런 것을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말레이시아에 대한 본질을 그저 인터넷이나 뒤지고 책 몇 권 보아서는 알 수 없었으니, 내가 예상했던 것과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이 모든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이곳으로 오는 것을 심각해 고민하다고 결국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난 그리 크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으로만 오면 뭔가 신나는, 행복한 일이 펼쳐지리란 막연한 기대와 희망만을 가지고 왔던 것이지요. 이 카페에 초창기에 올린 답사기만 보아도 내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비행기에 올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실망했고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 초창기의 홍역은 치렀습니다. 아직도 내가 치러야 할 홍역은 많이 남아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이곳 말레이시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겪어야 할 역경일 것입니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헤쳐나가야 할 어려움이라는 것이죠.
내가 한국에서의 생활과 비교할 수 있는 건 공무원 생활입니다. 한국에서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것과 이곳에서 사업가를 살아가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행복'하냐입니다. 나는 한국의 작은 지방자치단체에서 행정직 공무원으로 살았습니다. 공무원이 된다는 것, 공무원로 살아간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것인 줄 압니다. 나 역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공무원이 되고 싶어 투자한 시간과 노력들은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것이었을 정도로 내게 공무원이란 신분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또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안정된 시간과 수입은 마약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이라서 그것을 벗어나며 크나 큰 불안에 휩싸일 것 같았습니다. 특히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가트를 끌고 대형마트를 돌 때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따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따분을 넘어 지루해졌고 규칙적인 삶 자체가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공무원, 소신껏 일한다고 해도 남는 건 감사와 징계라는 불명예, 일을 많이 할수록 점점 늘어나는 일의 불균형, 주관은 없고 조직만 있는 몰개성 등등이 나를 옥죄어 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끔찍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탈출을 꿈꾸어 왔지만 나의 탈출구는 없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나의 탈출구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곳 말레이시아로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6개월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표를 던지고 말레이시아로 날아 올 때, 같이 일했던 공무원들이 박수를 쳤던 것입니다. 그들도 나와 같은 탈출을 꿈꿔왔지만 나는 실행을 했고 그들은 남아 있기에 적어도 내 용기에 만큼은 박수를 보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남아 있는 그들이 용기가 없다거나 어리석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삶이 있고 가치가 있으니 남은 사람은 남아 있어야 할 삶이 있는 것뿐입니다.
다만 고민하는 아버지들은,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아버지들은 결정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조직에 얽매여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처럼 끔찍한 것은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지만 과연 무엇이 가족을 위한 것인지, 아버지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 진정 가족을 위한 것인지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합니다. 단기적으로는 그것이 가족의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겠지만 가족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불행해지고 있는데 어찌 그 가족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다. 가족의 행복은 모든 구성원이 느끼는 행복의 평균치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불행하다면 그 가족의 행복의 평균치는 형편없이 낮아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민하는 아버지들이 현재의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와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은 자신에게 그 변화를 감내할 자신이 있는 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현재의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취미생활, 자기계발, 가족에의 사랑 등등 사람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요소는 어디이든 언제이든 있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변화가 정말로 자신이 요구하는 진실한 목소리인지를 귀담아듣고 그래도 이것만이 내 길이다라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변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곳에 와 몇 번 흔들리기는 했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좀 더 나은 생활이 펼쳐지리라는 걸, 즉 우리 가족이 모두 행복해지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계속 지켜갈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미래의 희망을 향한 시선입니다. 하지만 후회를 한다는 것, 그것은 과거를 향한 하향의 시선입니다. 아버지가 흔들리면 모두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후회하기 시작할 때는 가족 모두가 불행과 불안에 빠지는 시작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어디에 있든 살아가는 진리이지만, 자신의 삶을 송두리 채 바꾸었다면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이곳 말레이시아도 사람이 사는 사회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일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성실과 진실은 북극이든 남극이든 그리고 이곳 말레이시아이든 아버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일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들을 향해 말했지만 사실은 이것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난 아직 이곳에 정착한 게 아닙니다. 아직도 내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진 것 없이 왔으니 돈을 벌어야 하고, 배운 기술 없으니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돈만을 바라고 살지는 않겠습니다. 열심히 살되 진실되게 살 것입니다. 한 푼의 돈이 내게 절실하지만 그 한 푼을 위해 내 양심을 파는 어리석은 행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최고의 가치는 가족의 행복입니다. 난 가족의 행복을 위해 지혜롭게 살아갈 것입니다.
2022년 12월 현재 말레이시아는
*그렇게 시작한 말레이시아 이주는 15년 간 이어졌습니다. 이 이주기는 15년 내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초기 1년 반 정도 쓰고는 그 뒤로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어 중단되었습니다. 지금 이 블로그의 이주기 또한 거기에서 멈출 것입니다. 그 뒤로는 다른 정보를 쓸 생각입니다.
*지금 읽어보니 꽤 우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난 척을 하는 거지요. '나만큼 용기 있는가' '나처럼 결단을 내릴 수 있는가'라고 거만스럽게 묻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부끄럽지요. 말레이시아에 와 살면서, 많은 실패와 시련을 겪으면서 조금은 겸손해졌습니다. 실패로 인해 기가 다 죽은 것일 수도 있고요. 아무튼 당시의 글을 읽어보니 부끄럽습니다.
*말레이시아는 살만합니다. 매력적인 나라이고,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많기에 이주를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긍정적으로 검토하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위험하지 않은 곳, 리스크가 없는 곳, 내 미래를 보장해 주는 곳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게 인생이니 해볼 만하다고, 성공하지 못한 내가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