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한국의 우리 집 컴퓨터는 거실에 있습니다. 눈을 들면 산이 보입니다. 작은 밭과 비닐하우스와 양계장도 있습니다. 먼 산에는 눈이 하얗고 가까운 산에는 잣나무가 푸르릅니다. 지금 마당에는 눈이 하얗게 싸여 있고, 아내가 힘들게 치웠다는 통로만 눈이 녹아 흙을 검습니다. 오늘 하늘은 맑지 않습니다. 해는 구름 속에 가려 희미한 빛을 거실로 보내고 있습니다. 누렇게 변한 풀과 가지만 남은 나무들, 전봇대와 가로등, 휘어진 포도나뭇가지.... 눈물 나게 정겨운 모습입니다.
어제 오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제밤 11시 비행기를 타고 밤 새 하늘을 날아 새벽 6시에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항공권 값을 아끼려고 일본을 경유하는 편을 탔었지요. 새벽이라 가게 문도 닫혀 있고 사람들도 거의 없는 빈 공항 대기실에 앉아 졸음에 겨운 머리를 바닥에 뉘어 잠시 잠을 잤습니다. 난방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썰렁한 기운이 내 얇은 옷 속으로 스며들더군요. 거기에 비까지 내리고 있었습니다. 고인 바닥에 내리는 빗방울로 파문이 일고, 유리창으로는 빗물이 흘렀죠. 켜져 있는 TV에서는 미국의 육상선 수가 약물 복용으로 6개 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는 씨엔엔 뉴스가 나오고요. 몸은 피곤하고 잠이 부족한 머리는 멍하고 가벼운 한기가 느껴지는 나리타공항에서 그렇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다는 것, 그 축축함이 나쁘지 만은 않았습니다. 혼자 있다는 것과 무언가를 해야 할 의무감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정해진 시간이면 내가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여유와 함께 안정감을 주거든요. 그런 짧은 시간들을 난 너무나 사랑합니다.
10시 반 비행기로 한국을 향했습니다. 기내에서 와인 한 병을 마셨더니 바로 잠에 떨어졌고 눈을 뜨니 도착할 시간이었습니다. 창밖을 보니 비행기는 인천으로 진입하고 있는데 눈 덮인 들과 산이 보입니다. 맑지 않은 하늘과 멀리 안개에 싸인 것 같은 바다와 눈이 녹아 짙은 고동색을 보이고 있는 땅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아름답다는 걸 느꼈습니다. 외국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는 그런 모습들보다는 이제 또 현실로 돌아와 삶 속으로 들어간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이번에 하늘에서 본 우리나라의 모습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감정은 사물을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하더군요.
인천에 내려 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교보문고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말레이어 사전을 두 종을 샀습니다. 말레이어사전을 별도로 없고 인도네시아 사전이 있더군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입니다. 말레이시아 안에서는 한국어로 된 사전을 살 수 없습니다. 말레이-영어 사전을 살 수 있지요.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우리에게는 한국어로 된 사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과 관련된 책을 한 권 샀습니다. 말레이시아에 살면서 그 사회를 관통하는 이슬람에 대해서 조금은 알아야 하겠기에 산 것입니다.
오랜만에 온 교보문고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사람이 많아 걸어 다니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서점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말레이시아 상징인 쌍둥이 빌딩 안에도 대형서점이 있는데, 교보문고에 비하면 1/5 정도 될 것입니다. 그 안에 드문드문 책을 고르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먼저 한 번 말했지만 차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공원이나 건물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신문을 뒤적이는 사람이 좀 있을 뿐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 우리나라는, 우리 한국인들은 그래서 경쟁력이 있는 것입니다.
서울의 거리는 참 오랜만에 걸어보았습니다. 찬 바람과 거리 상점에서 풍기는 냄새와 여인들의 두꺼운 외투와 부츠, 건물과 차와 보도블록들이 참 정겨웠습니다.
집에는 늦게 도착했습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한 시간가량을 달려 청평에 도착하니 아내가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청바지를 입고 짧은 빨간색 외투 밤색 목도리를 두른 아내가 터미널 대합실 안에 있었습니다. 나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나옵니다. 우리는 포옹을 하지는 않았지만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런데 마치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눈물 나게 반갑고 감격스럽기보다는 친근함과 따스함 같은 감정이었습니다. 수년을 같이 한 친근함이 몇 달간의 헤어짐보다 큰 것인가 봅니다.
아내는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오늘 아침 늦게 일어났는데 장모님과 이웃에 사는 아내의 친구가 와 있었습니다. 잠자리에 까지 깔깔거리는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쉬지 않고 웃어대는 아내의 웃음소리에 행복이 가득 묻어 있음을 느낍니다. 아내는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잠도 안 오고 입맛도 없어서 거의 안 자고 못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리니 병이 나고, 며칠을 끙끙 앓다가 일어나고, 일 끝나고 집에 오면 텅 빈 집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이들 생각에 울고, 또 울고... 야위어진 아내의 얼굴에서 그동안의 아픔이 보입니다.
지금은 장모님과 친구와 함께 마트에 갔습니다. 싸가지고 갈 장류와 물건들을 사러 갔습니다. 물건을 담을 박스도 사 오라 했습니다. 책이며 그릇이며 살림살이를 미리 싸두려고 합니다. 책은 많이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글로 된 책을 사기 어렵습니다. 책 값도 만만치 않기에 가지고 있는 책을 많이 가져갈 생각입니다. 가서 같은 단지 안에 있는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도 좀 빌려줄까 합니다. 영어 공부에 힘겨운 아이들에게 우리글로 된 동화책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어른들이 읽을 만한 책도 가져가려고 합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어머니들이 읽을 책들이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지금 오후 3시 40분입니다. 벌써 떨어지는 해가 서산 위에 걸쳤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오후 3시는 한참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고 땅에서는 열기가 솟아오를 때인데, 벌써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아내가 돌아올 것입니다. 맛있는 걸 한아름 사가지고 올 것입니다. 해지고 어두워지면 식탁 위에 불을 켜고 아내와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을 것입니다. 오늘 자고 내일 자고 모래밤까지 우리의 행복한 시간이 이어질 것입니다.
2022년 12월 현재 말레이시아는
*이런 글을 써 놓았군요. 벌써 15년 전입니다. 살 집과 아이들 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아이들과 먼저 말레이시아로 떠났다가 한 달 남짓 되어 아내를 데리고 가기 위해, 또 짐을 부치기 위해 한국에 온 때였습니다. 가진 모든 것을 처분하였기에, 살던 집도 비워주어야 했지요. 그리고 며칠 뒤 아내와 함께 말레이시아로 날아갔습니다. 이제 정말 말레이시아 이주가 시작된 것입니다.